영성의 길

황희가 황희 될 수 있었던 이유

2022.08.15 09:55

안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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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 대부분이 이를 찬성했지만 황희는(중략)
세자 폐출은 가벼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였다(중략).
양녕대군 폐위 후 황희는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서민)으로 폐해졌다가,
경기도 교하로 유배되었다(중략).
유배의 길을 걷던 황희가 다시 관직에 등용된 것은
세종 때인 1422년 2월이었다.
황희를 깊이 신임했던 상왕 태종이
황희를 다시 불러들여 관직에 임용할 것을 부탁했고,
세종은 이를 흔쾌히 수용하였다.”
신병주 저(著) 《참모로 산다는 것》
(매일경제신문사, 37-3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태종은 행실이 방탕한 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세종을 세자의
자리에 앉힙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에 찬성하였으나,
황희는 반대를 합니다.
이에 황희는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뜻을 받들어 황희를 다시 관직에 임용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을 중용한 것입니다.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황희는 영의정의 대명사로
또한 청백리의 상징으로 영원한 영의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청렴한 재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보면 사간원 사헌부의 단골 탄핵 대상이 황희였습니다.
탄핵의 내용은 뇌물 수수와 관직 알선입니다.
세종의 용서와 덮어줌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황희 정승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기다림’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기다림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에 나오는
사랑의 속성 열 다섯 가지 중에서,
‘인내’에 대한 것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기다려 주심이 없었으면,
우리 모두는 날 것같이 떫은 맛만 내면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사1:9)